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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교황령 병합, 전 간기 동안 복원되지 않은 영토 등

by jyuung0104 2023. 5. 26.

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교황령 병합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교황령을 보호하는 마지막 방패막이였던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하자, 이탈리아 제국군은 마지막 교황령을 침공하여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하여 10월 2일 국민투표에서 공식적으로 로마와 라치오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이루어졌지만, 교황령의 병합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교황령은 1929년 라테란 조약에서 바티칸이 독립할 때까지 교황청의 포로로 남게 된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사르데냐-피에르몬테 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사르데냐-피에르몬테 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사르데냐-피에르몬테 대 프랑스[14] 등 강대국들의 지지를 얻었고, 다른 강대국들과 대치할 수 있는 외교력이 눈에 띄었다.

 

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전 간기 동안 복원되지 않은 영토

이탈리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 헝가리는 Trentino Alto Adige, Trieste 및 Stria를 통합했으며 녹색, 자주색 및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정확하게 이탈리아가 아직 통합하지 않은 복원되지 않은 이탈리아. 1870년 로마에 입성한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인들이 거주하는 대부분 지역을 통일했지만, 이탈리아 왕국을 통일하지 않은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땅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20세기 들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 정책과 결합하여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 이후 트렌티노 아르타 데 체, 트리에스테 등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의 일부인 자다르를 획득하였고, 결국 리예카를 획득하였으나 이탈리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가 몰타, 티치노, 산마리노, 바티칸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회복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는 달마티아 전역이 점령되었고, 스플리터와 다른 부분들은 이탈리아 영토에 병합되었으며, 다른 부분들은 괴뢰국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영토 일부가 되었지만, 크로아티아 독립국 자체는 추 축구 점령지에 세워진 괴뢰국가이며, 이탈리아 점령지는 이탈리아가 주재할 수 있어 사실상 이탈리아 영토 이외에는 없었다. 니스, 모나코, 코르시카는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당시 이탈리아군에 확보에 실패하였으나, 제2차 기회 안톤 작전에 참가하여 니스를 점령하고 중립을 유지하던 모나코가 침공하여 점령하면서 유명무실해진 빗이 프랑스와 코르시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되어 오히려 니스의 뗀다 주변의 계곡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승리한 이스트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였다.

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사진1

 

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부작용

이탈리아 북부는 서구의 전형적인 근대화 노선인 시민사회, 민족주의, 자유주의의 발전을 경험하였고, 이탈리아 민족주의도 북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그러나 근대화로부터 소외되었던 남부는 북부의 민족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남부인은 이탈리아의 통일이 주로 사르데냐 왕국과 피에몬테 왕국을 기반으로 한 북부에 의한 남부의 강제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그 결과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은 민족의식이 약했던 남부 이탈리아에 이탈리아인의 사상을 이식하기 위해 분투하였으나 통일 이후에도 남부에서는 두 시칠리아 왕국의 왕당파와 지역 주민의 반발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