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부작용
이탈리아 통일 이후 남북의 사람들은 서로 경멸하였고, 북방에서는 남방의 사람들을 농민의 거지로, 남방에서는 북방의 사람들을 옥수수죽 먹는 사람으로 경멸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탈리아군은 바퀴벌레 군대의 전형이었는데, 주로 북군과 남군은 서로 같은 이탈리아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서로 계속 경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이탈리아 사회의 주요 문제입니다. [24]그러나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이탈리아 반도는 분리의식보다 덜 동질적이고, 남부 문제는 민족 대립과 거리가 멀며, [25](교육 수준이 낮고 민족의식이 약했기 때문에), 상당수의 남부 농민들은 통일과 분리주의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시칠리아의 독립을 시작으로 한 통일 운동과 분리주의 모두 봉건제 폐지 당시 사라졌던 공공 토지 이용권의 회복이나 재분배를 주창했던 귀족과 부르주아 및 기타 지주들의 관심 분야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산 패디 스타의 농민반혁명운동으로 자유주의적인 파르테노프 공화국을 수립하지 못한 남부 혁명 세력은 카르보나리 반란과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 정복 과정에서 토지 문제의 근본 원인이 두 시칠리아 왕가인 것처럼 농민 지원을 선동하고,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후 지주를 대표하는 통일정부에 대한 반대, 토지 중과세와 징병제 등 근대체제의 이질성과 반동세력의 충동성이 맞물리면서 남부 전역에서 브리간타지오 반란이 일어났고, 이탈리아 신왕국 정부는 이를 진압하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체제를 강요하며 반도 전역에 중앙집권적인 권력체제를 구축했다. 현재의 남북 지역감정은 이러한 갈등 이후 확대되고 심화한 것들에 가깝고, 역사적 발전경로와 사회구조의 차이 때문인 이질성을 떠나 완전한 독일어권 국가인 주테틸로르를 제외하면 분리주의적 의식은 특별히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사 이탈리아 통일 그 외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멸망한 모든 민족의 세습 군주는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뉘엘 2세의 7촌 이내의 친척이었다. 페르디난트 4세, 투스카니 대공: 레오 폴도 2세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삼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할머니 프란체스코 1세의 손자, 6촌. 롬바르디아 왕국과 베니스 왕국의 프란츠 요셉 1세 : Victor Emmanuel II의 외할아버지와 토스카나의 Ferdinand III 형제의 손자. Robert I, Parka 공작 : Victor Emmanuel II의 모친 증조부인 Leopold II의 딸인 Maria Clementina와 7번째 사촌의 손녀의 아들. Francesco V, Morena Rezko 공작 : Victor Emmanuel II의 모친 증조부인 Leopoldo II의 형제인 Ferdinand Carl의 손자.그 이유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어머니와 부인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토스카나 대공 가의 일원이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왕족들은 모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과 혼혈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대한제국은 이탈리아 통일 과정을 소개하고 한국에도 민족의식을 고취해야 한다는 이탈리아 건국 3대 설화라는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