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3월 혁명 통합 시도
동시에 당시 독일 사회에서 점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민족주의에 입각한 통일 독일을 만들려는 시도도 3월 혁명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설립되자 그 시도는 가속화되었다. 전반적으로 중앙 우익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뜨겁게 달군 가장 뜨거운 화제는 정확하게 통일범위의 문제였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주축을 주장하는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 왕국의 주축을 주장하는 소독일 주의의 첨예한 대립이었다. [8]
초창기에 일반적인 권력을 얻은 것은 대독일이었지만,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발칸 반도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이 분명해졌고, 의회에서도 점차 소독 선은 꿩 대신 닭의 심장으로 지지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군주제가 통일 독일 군주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9]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블룸은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유럽사 3월 혁명 붕괴
이러한 상황에서도 1848년 12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굴복하지 않고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헌법을 통과시켰으나, 이미 반동세력이 집권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에서는 말 그대로 씹어 먹히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소멸하였다.
혁명 세력은 남독일 지역에서 여전히 강했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에도 그들의 세력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약했다. 여기에 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던 온건 중도파 세력은 급진적인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등장에 겁을 먹고 구정권의 특권층(...)과 결탁했다.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독립 봉기가 진압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 번 독일의 내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1849년 5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마침내 해산되었고, 독일 3월 혁명은 결국 전복되었다.
유럽사 3월 혁명 여담
독일의 국기인 흑 적금 삼색기가 대중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였다.
3월 혁명의 실패에 환멸을 느낀 많은 독일인은 부와 자유를 찾아 신세계를 향해 출발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많은 독일계 미국인 조상이 40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 외에도 독일 망명자들은 젊었을 때 카를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유럽과 다른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이 독일 이민자들은 남북 전쟁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조국과 재산권(노예)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사기가 높았던 남군에 비해, 북군은 노예 해방을 위한 투쟁과 인간의 자유라는 숭고한 목표라는 자부심으로 사기가 높았다. 그리고 북군(연방군)에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비율을 보면 독일군은 아일랜드인(집에서 영국군에게 억압받았던 기억이 있는)에 이어 2위였다. 예를 들어, 3월 혁명의 가장 유명한 연설가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해커는 연방 대령을 지냈다.
비스마르크는 3월 혁명의 실패를 회상하며 우리 독일인들은 콩가루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명백하게 밝혀진 때는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민족주의자가 아니었고, 오래된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대신 대중과 부르주아지를 달래고 프러시아의 입장을 진전시키기 위해 독일 통일을 추구했다. 그는 독일 통일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독일에 오스트리아를 추가하고 싶지 않았고, 이는 명백히 프로이센의 입장을 깎아내리려는 것이다.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는 폭동을 진압한 병사들에게 망원경을 빌려주고, 폭동으로 사망한 프로이센 병사들의 유족들에게 유언장에 그들의 유산을 나누라고 말하는 등 이 사건을 강하게 비판했다.